본문 바로가기
라이프 로그/관찰일기

자동화, 이상과 현실 사이

by 공튼이 2025. 7. 12.

자동화는 달콤한 약속을 속삭인다. "더 이상 지루한 반복 작업에 시달리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그 약속을 믿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더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괴물을 키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orz...

1. 달콤한 자동화의 유혹

자동화는 지루한 노예 생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구세주처럼 보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파일을 복사하고 붙여 넣던 지겨운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 준 자동화 덕분에, 전략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진짜' 일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되었다. 휴먼 에러도 줄어들고, 업무 정확성도 높아졌다. 일견 완벽한 승리처럼 보인다.

 

이런 성공 경험은 자동화에 대한 기대를 위험할 정도로 부풀린다. "이것도 자동화하면 좋겠다", "저것도 자동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라며 점점 더 많은 분야로 횡전개하고 싶어 한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가, 모든 것을 그 도구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모든 장난감에는 사용 설명서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2. 예상 못한 자동화의 함정

자동화는 완벽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멍청하다. 자동화는 결국 수많은 입력 데이터와 다양한 조건을 미리 가정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로직에 불과하다. 그리고 현실은 가정을 비웃는 것을 좋아한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보고서 작성과 데이터 가공을 자동화하는 도구를 개발해 동료들에게 공유했던 적이 있다. 처음엔 "신의 한 수" 같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원본 데이터의 형식이 아무런 고지도 없이 변경돼 버리는 바람에 자동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급하게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고치느라 가슴 졸이며 마감을 맞추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깨달았다. 자동화는 변화를 미워한다.

 

이런 경험은 자동화의 근본적인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동화를 만들 때는 "이 조건들은 절대 안 바뀔 거야"라고 순진하게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언제든 찾아온다. 마치 우리가 완벽한 계획을 세웠을 때 인생이 가장 큰 변수를 던지는 것처럼. 결국 자동화는 꾸준한 관리와 조정이 필요했고, 새 담당자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해 줄 때마다 복잡한 로직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부담도 따라왔다.

 

3. 장밋빛 환상의 위험성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자동화의 성공 스토리만 화려하게 포장되어 돌아다닌다. 편리하고 멋진 결과만 강조되고, 리스크와 부담은 슬며시 카펫 밑으로 쓸려 들어간다. 문제를 외면한 채 달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통제 불능의 상황이 터지고,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우린 그런 얘기한 적 없는데?"라며 손사래를 치기 마련이다.

 

보안을 위해 도입한 MFA(다중 인증)가 대표적인 사례다. MFA는 사용자의 신원을 보안 담당자가 수동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시스템이 자동으로 검증하도록 설계된 전형적인 ‘보안 자동화’ 기술이기 때문이다. 생체 인증이 가능한 개인 휴대폰을 기반으로 신원을 자동 확인하도록 설계됐지만, 본인 번호를 시스템에 등록해야 하기 때문에 단기간 투입된 외주 인력은 애초부터 적용이 어렵다.

 

휴대폰으로 지문 인증을 할 때마다 짜증이 치솟고, 어느 날 갑자기. MFA 서버가 장애를 일으키자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업무 시스템 접속이 막히면서 회사 전체가 멈춰 섰고, "보안을 강화하겠다"던 취지는 직원들이 인증 단계를 기피하는 역효과로 돌아왔다. 보안을 위해 만든 시스템이 오히려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셈이다.

 

자동화는 편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의존성과 취약점을 만들어낸다. 시스템이 고도화될수록 정교한 도미노처럼 한 조각이 쓰러지면 연쇄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도 커진다.

 

4. 현실적인 자동화를 위한 지혜

이런 문제를 방지하려면 자동화를 도입하기 전에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Pain X Frequency 테이블을 활용해 보는 것이 현명하다. 이는 업무의 귀찮음 정도(Pain)와 반복 빈도(Frequency)를 곱해 자동화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이다. 감정이 아닌 수치로 판단해 보자는 접근 방법이다.

 

The Pain Frequency Matrix | Landon Howell

 

The Pain Frequency Matrix | Landon Howell

Startup ideas are easy. The right startup ideas are hard.

www.landonhowell.com

 

예를 들어, 매일 반복되는 파일 이동 작업은 빈도가 높고 귀찮음 지수도 커서 자동화 후보 1순위지만, 1년에 한두 번 정도 하는 설문조사 데이터 분석 작업은 오히려 그때그때 사람이 상황에 맞춰 처리하는 게 더 현명할 수 있다. 심지어, 설문 결과를 보고 받으실 분의 관심사가 지난해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일주일에 5분 걸리는 작업을 자동화하려고 한 달간 개발하고, 매달 1시간씩 유지보수하는 건 명백한 자해 행위다.

 

또한 'YAGNI(You Aren't Gonna Need It)'의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나중에 이런 기능도 필요할 것 같은데..."라며 미리 복잡하게 만들어두면, 결국 그 기능은 쓰지도 않으면서 코드만 복잡해지고 유지보수 비용만 늘어나기 쉽다.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 중 상당 부분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인정하자.

 

5.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용기

상황에 따라 자동화는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게 좋다. 주기적으로 자동화 시스템을 점검하고, 복잡성과 관리 비용이 커지는 부분은 과감히 정리해 주는 게 필수다. 탄탄한 업무 프레임워크와 체계는 분명 중요하지만 자동화에 지나치게 꽂혀서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애당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동화는 어디까지나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 무엇을 자동화할지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자동화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상황에 따라선 그냥 손으로 하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할 수도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최고의 자동화는 우리가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되, 그 자체가 또 다른 일거리가 되지 않는 자동화다. 자동화가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믿었지만, 결국 우리가 자동화를 구원해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