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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로그/관찰일기

“자네, 아직도 사람을 믿나?”

by 공튼이 2025. 6. 29.

오징어 게임 시즌3가 공개된 게 엊그제다. 마지막화까지 정주행 하면서, 시즌1 마지막 회. 그 대사가 떠올랐다. 폭설이 소복이 내려앉은 병원 옥상에서 오일남이 내던진 한마디는 결말을 가르는 칼끝이었다. 그는 인간의 믿음을 비웃듯 새로 내기를 제안했고, 화면을 바라보던 우리는 그 질문이 곧 우리 자신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믿는 일은 과연 무모한 낭만일까, 아니면 계산된 선택일까.?
 
어느샌가부터—신뢰를 "관리되는 리스크"로 보게 되는 편이다. 차를 몰고 나설 때 사고 가능성을 지울 수 없지만, 속도를 조절하고 안전벨트를 매며 보험에 가입해 위험 노출을 설계하듯이, 관계에서도 우리는 위험을 통제해야 한다. 신뢰는 로또가 아니다. 로또는 번호를 고른 뒤 결과를 기다릴 뿐이지만, 신뢰는 매 순간 계약서를 다시 써 가며 위험 범위를 협의하는 일에 가깝다.
 
나는 처음 만난 이에게는 예의만큼의 작은 신뢰만 내어준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는 검증과 기록을 곁들인 신뢰.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편안함을 느낄 때 내 모습. 그리고 취약함을 맡긴다. 이를테면 얇은 물컵, 두꺼운 머그잔, 두 손에 꼭 감싸 쥔 보온병처럼, 용기마다 담을 수 있는 액체의 온도와 부피가 다르다. 특히 심층적 신뢰는 쉽게 넘치거나 깨지면 회복이 어려우니 의식적으로 그 그릇을 작은 개수로만 두고 살기로 했다. 이 결정을 유지하려면 주기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약속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과, 내가 정한 경계선을 존중했는지 등, 그리고 나 또한, 상대방에게 마찬가지일 터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분산하듯, 관계도 분산해 둔다. 위기가 닥쳤을 때 모든 다리가 동시에 무너지지 않도록. 일, 재정, 감정, 고민상담의 각 영역마다 같은 사람을 과도하게 얽어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아무리 조심해도 손실은 불가피하다. 배신, 오해, 단절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그때마다 나는 잃어버린 돈과 시간, 그리고 멍든 감정을 '학습 수수료'로 환산해 본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실패 원인/손실을 꼽씹어보면, 그것은 다음 투자를 위한 자산이 된다. 반대로 "왜 하필 나냐"는 억울함에 묻어두면, 상처만 남고 경험치는 쌓이지 않는다.
 
결국 질문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 완전한 불신은 우리를 섬처럼 고립시키고, 무제한 신뢰는 우리를 파괴할 가능성이 크다. 남는 선택지는 제한된 위험만큼, 감당 가능한 만큼, 그러나 여전히 따뜻한 만큼, 딱 그만큼 사람을 믿는 일이다.
 
폭설 속 노숙자에게 담요를 덮어준 이름 모를 행인처럼, 우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서로를 덮어줄 수 있다. 안전벨트를 매고, 속도를 조절하며, 보험 약관을 갱신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믿는다—관리된 리스크만큼, 그리고 그것이 허락하는 만큼의 온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