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일어나 똑같은 시간에 커피를 내리고, 같은 길로 출근하는 나를 보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왜 나는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면서도,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걸까. 오늘 저녁에는 평소와 다른 길로 돌아가 볼까, 안가던 곳에 들러볼까 하는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묘한 이중성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Pseudo Random Generator 를 갈구하는 모습과 앞날을 촘촘히 설계해 루틴화하는 모습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다.
무작위성에 대한 우리의 매혹은 깊다. 사람들이 하드웨어 난수 생성기를 찾고, 양자 터널링이나 열 잡음 같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현상에서 나오는 '진짜 랜덤'을 신뢰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단순히 기술적 필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 주는 신선함, 새로움에 대한 도파민의 단맛이 있고, 랜덤함 속 공정함에 대한 믿음이 자리한다. 누가 더 운이 좋은가를 따지기보다는, 시스템 자체가 편향 없이 공정한가를 중시하게 된 현대 사회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루틴의 단단함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순서로 씻고, 같은 자리에서 아침을 먹는 일상의 반복이 주는 안정감. 이는 단순한 게으름이나 창의성 부족이 아니다. 절차 기억에 저장된 자동화된 행동들이 우리의 인지 자원을 절약해주고, 그 남은 에너지를 정말 중요한 일들 - 창작이나 대인관계, 새로운 문제 해결 - 에 쓸 수 있게 해준다. 루틴은 우리에게 예측 가능성을 주고, 불안을 줄이며, 장기적인 목표를 현실화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다.
그렇다면 이 두 욕망은 영원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루틴한 삶의 일부를 프리하게 만들어두거나, 같은 작업 뒤에 무작위 보상을 설정하는 식으로 두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다. 계획된 우연이라는 역설적 개념도 가능하다. 정기적으로 낯선 환경에 자신을 노출시키되, 그 노출 자체는 계획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실용적 해법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애초에 삼라만상,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정말 규칙이라는 게 있는 걸까..? 싶다.
과학자들은 수학적으로 완전히 명시된 기저 법칙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법칙들조차 확률적이거나, 혹은 초기 조건에 극도로 민감한 혼돈 체계의 모습을 보인다. 날씨 예보가 2주.. 아니 요즘은 간혹 반나절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틀림없이 법칙은 분명히 있다지만, 작은 오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버린다. 더 복잡해지는 것은 생명이나 경제, 문화 같은 것 들이다. "대략 이럴 때 대체로 저럴 것"이라는 통계적이고 조건부적인 법칙들만이 작동한다. 개미 한 마리의 행동은 시뮬레이터로 예측할 수 있지만, 개미 군집이 만들어내는 도로 패턴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법칙을 따른다. 법칙이 없는 게 아니라, 새로운 레이어에서만 유효한 법칙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혼돈을 걷는 개미
1. 단순한 규칙, 복잡한 여행처음엔 의미 없어 보였다. 하얀 격자 위를 한 마리 개미가 걷는다. 1986년 크리스 랭턴이 만든 이 가상의 개미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규칙을 따른다. 흰 칸을 만나면
prozac0401.tistory.com
결국 "규칙이 있다"와 "없다"는 이분법 자체가 불가능 한 셈이다. 차라리 법칙이란 "금지 조건"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가 아니라 "법칙을 어기는 사건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경계선 역할. 그 경계선 안에서는 우연과 자유와 창발이 춤을 춘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이중적 욕망이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규칙과 무작위가 공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지만, 다음에 무슨 생각을 할지는 나조차 예측할 수 없다. 걸음걸이에는 패턴이 있지만, 길에서 누구를 만날지는 모른다. 마치 동양철학의 음양 개념이 떠오른다. 태극 마크를 보면 검은 점 안에 흰 점이, 흰 점 안에 검은 점이 있다. 완전한 질서도, 완전한 무작위도 없다는 뜻이다. 질서와 혼돈이 서로를 품고 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물리학자의 눈으로는 분자의 브라운 운동과 열역학 법칙이 보일 것이고, 뇌과학자는 카페인의 신경전달물질 작용을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그냥 따뜻하고 쌉쌀한 맛. 기름진 입속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그 느낌이다. 전혀 다른 경험으로 다가올수도 있는 그 경험 속에는 설명 가능한 부분과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어쩌면 "잘 모르겠다"는 것이 가장 정직한 답일지도 모른다. 삶은 알 수 있는 부분과 알 수 없는 부분이 끊임없이 춤추는 과정이다. 그 모호함, 그 불확실성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간다운 일이다. 그러니 오늘 저녁에는 평소와 다른 길로 돌아가 보자.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여전히 같은 시간에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규칙과 우연 사이에서 찾아낸 균형이고, 삶이라는 이름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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