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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로그/관찰일기

매년 5월..!

by 공튼이 2025. 5. 23.

지하주차장에서 지하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차생활을 해오다가, 지난해 근무지가 바뀌면서 야외를 걸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집과 사무실이 2km 정도 떨어져 있어 도보 출근이 가능했지만, 지난 겨울엔 차를 자주 이용했다. 걷기 싫어서가 아니라 비나 눈 오는 날이 유독 싫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면 세상이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아 몸과 마음이 함께 눅눅해진다. 우산을 써도 옷자락이 젖고 신발에 물이 스며들며, 회색 하늘은 기분마저 무겁게 만든다. 누군가는 그런 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지만, 나에겐 모든 게 귀찮아지고 외출을 피하고 싶어지는 날일 뿐이다.

 

이게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얼마 전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내가 HSP 인지는 모르겠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길 바라지만, 어딘가 민감한 사람인 건 맞는 것 같다. 새벽 일찍 뜨는 해에 기상시간이 빨라지는 것, 윗집 아이들이 방과 방 사이를 전력질주하듯 달리는 발소리, 아파트 축제 때 우퍼의 진동이 갈비뼈를 울리는 느낌이 너무 싫어 아예 하루종일 먼 곳으로 나를 내몰았다. 이 뿐 아니라 낯선 여행지에서 잠 못 드는 것까지.. 사소해보이는 변수 하나에도 마음이 크게 요동치는 것들이 모두 설명되는듯 했다. 무튼.. 자극에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진하게 반응하는 사람. 그런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저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닌 사람에 대한 개념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됬다. 

 

그렇다면 이 민감함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 마냥 피하기만 할 수는 없으니, 좋은 자극들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로 했다. 특히 5월 같은 계절에는 더욱 그랬다. 장마 오기 전 더없이 쾌적한 날씨, 바람은 선선하고 햇살은 가볍고 따뜻한 바로 그 계절이 오면, 매년 5월마다 나는 없던 일을 만들어서라도 밖으로 나가려 했다. 햇살을 맞으며 걷고, 초록 잎 사이로 비치는 빛을 보며, 살아 있는 감각 하나하나를 전부 누리려 했다.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나홀로 노을 보러 갔다 허무하게 일찍 돌아온 궁평항부터, 유독 이곳저곳 많은 곳을 돌아다닌 것 같다. 걸으며 든 감상도 많았던지라, 블로그도 이맘때 다시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에 하루하루를 밖에서 보내려 애썼고, 매일 매일 그렇게 충전 중이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온 사람 (from. 궁평항)

요 몇일 전, 긴 연휴가 시작되자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집 안에 갇혀 숨이 차오른 듯, 이유 없이 바깥공기가 간절했다. 창밖으로는 봄이 찾아왔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

prozac0401.tistory.com

 

무튼, 5월 한 달간 그렇게 '쨍한 날'을 마음껏 누린 다음, 생각해보니 내가 비 오는 날을 막 예전처럼 두려워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충분히 충전된 느낌으로 비 오는 날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날은 그냥 쉬거나... 큰 우산을 들고 천천히 걷거나, 즉. 밖은 비가 와도, 나는 나를 감싸고 다독일 수 있으면 된다.

 

삶은 늘 똑같은 자극만 주지 않는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폭풍도 있다. 난 그걸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만큼 좋은 반응에도 민감한 사람이라, 평상시 표현을 하진 않지만 사소한 것에 감동을 쉽게 받는 편이다. 작은 음악에 울컥하고, 한 마디 말에 안도하고, 하늘의 결 하나에 위로받는 사람.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햇살 좋은 날, 나는 마음껏 세상을 느껴도 되는 사람이다.”
“비 오는 날, 나는 조용히 쉬며 나를 다독여도 되는 사람이다.”

그 두 가지 모두가 나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고, 바꾸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그때그때 내 마음을 알아차려주면 된다. 그게 내가 나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오늘밤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찜기에서 소리가 들린다.

뜨끈한 만두나 먹으러 가야겠다. 오늘은 그냥, 그거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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