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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이동/국내

흐린 날의 영월, 한반도지형에서 젊은달 Y파크까지

by 공튼이 2026. 6. 21.

여행지는 아침부터 또렷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갈 곳을 찾다가 일정이 바뀌었고, 결국 혼자 떠나게 됐다. 출발 시각은 오후 12시 50분. 당일치기로 영월을 향하기에는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한 곳만 제대로 보고 와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처음 목적지는 영월 한반도지형 이다. 그다음은 현장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는 자연이 만든 풍경에서 사람이 만든 낯선 공간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제천의 오래된 식당에서 뜨거운 국수 한 그릇으로 닫혔다.
 
 

1. 한반도지형 주차장

주차장에 도착하니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유명 관광지다운 정도의 방문객이 있었고, 주차장 뒤로 전망대에 오르는 숲길이 바로 이어졌다.

한반도지형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의 풍경

 

전망대로 이어지는 나무계단과 산불조심 안내
숲길 한쪽에 줄지어 놓인 작은 돌탑들

 
전망대까지 가는 길은 긴 산행이라기보다 짧은 숲길에 가깝다. 다만 계단과 바위, 드러난 나무뿌리가 있어 완전한 평지 산책은 아니다. 게다가 전날 비가 많이 내려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길가의 작은 돌탑을 구경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여긴 슬리퍼보다는 운동화가 잘 어울리는 길이다.
 

2. 사진으로 보던 지형을 실제로 만나다

전망대에 닿자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이 한 번에 펼쳐졌다.

전망대에서 마주한 영월 한반도지형

 
강물이 크게 휘어 육지를 감싸고 있다. 누군가 일부러 깎아 만든 것도 아닌데, 한반도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이 제법 또렷했다. 정말 비슷할까? 라는 단순한 궁금증으로 찾아왔는데,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공간감이 컸다. 오늘은 안타깝게도 맑은 날씨가 아니었다. 대신 구름 사이로 잠깐 푸른빛이 보였고, 산과 강의 초록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쨍한 관광사진과는 다른, 흐린 날만의 깊이가 있었다.
 

강 위를 천천히 지나가던 작은 뗏목

 
정지된 풍경 아래로 작은 땟목 한 척이 지나갔다. 땟목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물결 덕분에 고요한 강이 잠깐 움직였다. 풍경을 찍으러 왔다가, 우연히 들어온 작은 움직임까지 함께 기억하게 됐다.
 

영월 한반도습지 습지지역 안내판

 
이곳이 재미있는 것은 단지 지형의 모양이 한반도를 닮아서만은 아니었다. 안내판을 보니 한반도 모양의 지형 주변으로 습지가 이어지는 생태 공간이기도 했다. 강이 오랜 시간 깎고 쌓으며 만든 결과라고 생각하니 눈앞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한반도지형은 결국 대표사진 한 장이 강한 곳이다. 하지만 그 한 장을 만나러 가는 짧은 숲길과, 전망대에서 머무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생각보다 여행의 모양이 분명했다.
 

3. 젊은달 Y파크

 
한반도지형을 내려온 뒤 충주 쪽으로 이동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남은 시간과 동선을 생각하면 영월 안에서 한 곳을 더 보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즉석에서 고른 곳이 젊은달 Y파크 란 곳이다. 한반도지형이 자연이 만든 곡선이라면, 젊은달 Y파크는 사람이 만든 붉은 선과 재료가 강하게 남는 공간이었다.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는 붉은대나무는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다.

젊은달 Y파크 입구의 ‘붉은대나무’ 안내

 

붉은 구조물 사이로 올려다본 흐린 하늘

 

붉은 선 너머로 보이는 흰 건물과 회색 하늘

 

하얀 발자국이 이어지는 붉은 길

 
입구부터 강렬했다. 실제 대나무 대신 붉은 파이프가 촘촘하게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흐린 하늘과 흰 건물이 보였다. 바닥에는 하얀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그 발자국을 따라 걷는 순간부터 미술관을 ‘관람한다’기보다 어떤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천장에 나무 조각이 뻗어 있던 실내 공간

 
실내는 바깥의 붉은 구조물과 또 다른 분위기였다. 천장에서 뻗어나온 나무 조각, 커다란 창, 오래된 찻잔과 커피 도구가 한 공간에 섞여 있었다. 미술관과 카페, 누군가의 수집실이 겹쳐진 듯했다.
 

오래된 찻잔과 커피 도구가 모여 있던 자리

 
온라인 예매를 했더라도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교환해야 한다는 안내도 보였다. 공간은 친절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기보다, 서로 다른 장면을 다음 방으로 계속 밀어 넣는 방식에 가까웠다.
 

미술관 입장 동선을 알려주는 안내판

 
나무 조각이 빽빽하게 겹친 통로에 들어서자 거대한 둥지 속을 걷는 느낌이 났다. 가까이에서는 거친 껍질과 철사가 보였고, 고개를 들면 둥근 하늘이 열렸다. 바깥의 붉은대나무가 젊은달 Y파크의 첫인상이라면, 이 나무 통로는 안쪽에서 만난 대표 장면이었다.
 

나무 조각이 겹겹이 이어진 통로의 표면

 

둥글게 열린 하늘을 올려다본 장면

 

거대한 나무 둥지 안을 걷는 듯했던 통로

 
이번엔 꽃과 빛으로 가득한 화원이다. 공간마다 특유의 향을 연출해 두었다.

전시 입구

 

꽃과 조명이 만든 부드러운 색감

 

가까이에서 본 꽃의 질감

 

꽃과 철망, 빛이 뒤섞인 공간

 
문을 지나자 꽃과 덩굴, 조명이 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절제된 전시라기보다 일부러 넘치게 만든 작은 환상에 가까웠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화려한 방이었고, 가까이 다가가면 꽃잎과 색, 빛의 번짐이 따로 보인다. 처음에는 조금 과격하다고 느꼈지만, 그 과함이 오히려 이 공간의 성격같다. 이곳에서는 전체를 찍다가도 금세 한 송이의 질감에 카메라를 가까이 대게 된다.
 
다음 길을 따라 쭉 가면, 익숙한 재료를 낯설게 사용한 몇가지 작품들이 나온다. 겹겹이 잘린 조각은 터널이 되었고, 꽃 그림은 돌벽 위에서 더 선명해졌다. 

겹겹이 잘린 형태가 터널처럼 이어진 작품

 

돌벽 위에 걸린 화려한 그림

 
붉은 구조물 앞의 흰 인물상은 멀리서도 시선을 끌었다. 

붉은 구조물 앞의 흰 인물 조각

 
가느다란 금속선이 모인 조형물은 가까이 갈수록 흐르는 천이나 식물의 뿌리처럼 보였다.

가느다란 금속선이 모인 조형물을 아래에서

 

금속선이 흘러내리듯 모인 조형물의 아랫부분

 
 
젊은달 Y파크의 작품들은 익숙한 재료를 낯선 크기와 방식으로 보여줬다.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해도, 표면과 구조를 오래 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양쪽 붉은 벽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통로

 
붉은 복도를 지나자 재료의 분위기가 한층 거칠어졌다. 거대한 나무 덩어리는 둥지나 생명체처럼 보였고, 사각 금속관은 공중에 매달려있다.
 

천장에서 무리를 이루며 매달린 사각 금속관

 
길게 늘어진 검은 고무 조각과 벽의 말 뒷모습은 진지함과 엉뚱함 사이를 오갔다.

검은 고무 폐타이어 조각이 길게 늘어진 작품

 

벽에 나란히 놓인 세 개의 말 뒷모습

 
하얀 소금결정 표면과 실 덩어리, 색이 겹친 추상 작품은 가까이에서 볼수록 좋았다. 현장에서는 휙 지나칠 수 있는 질감이 집에 돌아와 사진을 볼 때 더 또렷하게 살아났다.

하얀 솜 처럼 보이던 소금 결정 표면

 

붉고 주황빛인 실 조형물

 
 

하얀 소금 기둥 사이에 떠 있는 색색의 실 덩어리들

 

평면 밖으로 튀어나온 실의 결

 
커다란 원형 나무 구조물은 그릇 같기도 하고 배 같기도 했다. 

원형 나무 구조물과 거친 나무 조각이 놓인 실내

 
밖으로 나오면 흰 건물과 영월의 산, 붉은 벽이 한 장면에 들어왔다. 바닥의 놀이판과 창가의 색색 안전콘까지 작품인지 일상적인 물건인지 잠깐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애매함마저 자연스러웠다.
 

창가에 모여 있던 색색의 안전콘

 

원형 구멍과 붉은 구조물이 함께 보이던 장면

 
문손잡이에서 시작된 선은 달리는 새가 되었고, 까만 동물 오브제는 무엇을 닮았는지 쉽게 정하기 어려웠다. 작업실 같은 선반, 긴 나무 테이블, 천장에서 떠 있는 작은 인형과 천 조각도 차례로 나타났다.
 

문손잡이에서 뻗어나간 선으로 완성된 한마리의 새

 

상상 속 동물처럼 보이던 검은 오브제

 

선반과 작업대 위에 놓인 작은 물건들

 

길게 이어진 나무 테이블과 실내 전경

 
한쪽에서는 빈티지 맥주 간판과 배관, 금속 탱크가 오래된 공장이나 펍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따뜻한 구리빛 도구는 그 속에서 유난히 반짝였다. 젊은달 Y파크는 강렬한 대형 구조물 사이에 이렇게 작고 장난스러운 장면을 숨겨두고 있었다.
 

빈티지 간판이 바닥을 채운 공간

 

따뜻한 구리빛을 내던 증류 도구

 
바깥 풍경을 한 번 훑은 뒤 다시 실내로 들어가니 알록달록한 뜨개 조형물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가까이에서는 코와 실의 결이 보였고, 다른 방에서는 붉은 실 사이에 은색 구슬이 무리를 이뤘다.
 
실은 벽과 천장을 가로질러 공간의 윤곽을 바꾸고 있었다. 조명과 반사된 구슬, 뜨개 조형물이 겹치면서 잠깐 작은 우주 안에 들어온 듯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천장에서 내려온 알록달록한 뜨개 조형물

 

붉은 실 사이에 모여 있던 은색 구슬들

 

실과 뜨개 조형물, 검은 동물 오브제가 이어진 방

 
의외로 오래 남은 것은 창문 너머의 풍경이었다. 마치 밖으로 낸 창이 액자가 되는 순간이랄까, 둥근 창 안에 소나무가 꼭 맞게 들어왔고, 긴 창에서는 나무 뒤로 붉은 구조물이 살짝 보였다. 실내에서 본 바깥은 하나의 작품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둥근 창이 액자가 되어 담아낸 소나무

 

긴 창으로 바라본 소나무와 붉은 구조물

 
춤을 추는 듯한 작은 종이 인물들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다시 붉은대나무가 나타났다. 한옥 지붕과 소나무, 영월의 산, 붉은 구조물이 한 화면에 겹쳤다. 처음에는 튀어 보였던 붉은색이 관람을 끝낼 무렵에는 이 풍경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붉은대나무와 소나무, 한옥 지붕이 겹친 풍경

 
들어갈 때 따라갔던 하얀 발자국을 반대로 걸어 나왔다. 차에 올라 출구를 지나며 벽의 ‘젊은달 Y파크’ 글자를 한 번 더 찍었다.
 

하얀 발자국을 따라 나가는 마지막 길

 

5. 제천식당에서 꼴두국수와 수제만두

영월을 나와 저녁은 제천식당에서 먹었다. 티맵에서 영업 종료가 아닌곳 한군델 발견하고 바로 갔다.

제천식당 외관

 
식당 외관부터 오래된 동네 식당의 분위기가 났다. 메뉴판에는 1973년 1월 31일 개업이라고 되어 있다. 대표 메뉴인 꼴두국수의 이름도 흥미로웠다. 메밀국수를 너무 자주 먹던 시절 '꼴도 보기 싫다'는 말에서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이다. 이날 주문한 것은 꼴두국수와 찐만두였다.

제천식당 메뉴판과 꼴두국수 설명

 
흔히 볼수 있는 단촐한 상차림인데, 기분탓인지.. 양념장에서 곤드레 나물 향기가 난다.

수제만두와 김치, 양념장

 
꼴두국수에는 김가루와 깨가 수북하게 올라가 있었고, 국물 안에는 두부와 메밀면이 보였다. 비슷한 느낌으론, 김치 칼국수 같은게 있었던거 같다. 따뜻하고 전분기 머금은 걸쭉한 국물을 한숫갈씩 떠먹으며 배를 채우고 나왔다.
 

김가루와 깨를 얹은 뜨거운 꼴두국수

 

6. 여행을 마치고

12시 50분이라는 늦은 시각에 출발한 여행이었다. 계획도 여러 번 바뀌었고, 처음부터 완성된 일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한반도지형의 강을 내려다봤고, 붉은 구조물과 수많은 재료 사이를 걸었으며, 제천에서 국수와 만두로 하루를 끝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꽤나 피곤했다. 그런데 사진을 넘겨보니, 여행지에 있을때 보다 기억이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날씨가 맑고, 일정이 완벽할 필요는 없는것 같다. 늦게 나서도 한 장면을 만나고, 다음 장면으로 나 스스로를 데려갈 수 있다면 그날은 충분히 여행이 된다.
 
이날의 한 줄은 이렇게 남기고 싶다.

자연이 만든 미니 한반도를 보고, 사람이 만든 붉은 세계를 걸은 뒤, 뜨거운 국수 한 그릇으로 하루를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