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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실험실/물건 노트

미사용품은 ‘언젠가’의 잔해

by 공튼이 2026. 2. 22.

창고 문을 열 때마다 특유의 냄새가 나를 반긴다. 종이박스 냄새, 오래된 플라스틱 냄새, 한번 정리해두면 그 자리에 고여버리는 시간의 냄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다이캐스트 자동차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모형들이다.

 

 

 

책상 위에서만 달릴 수 있는 축소된 모형 차들. 스티어링 휠을 감는대로 바퀴가 돌아가고, 도장이 빛나고, 헤드라이트가 그럴듯한 차들. 스스로 굴러갈 힘이 없다일 뿐, 구현도 매우 잘 되어 있다. 요즘엔 그 차들을 잘 구경하지 않는다. 딱히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고 나면 어딘가 맘이 조금 이상해져서다. 창고는 취미를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내가 언젠가 다시 살기로 했던 나를 보관하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문을 닫고 돌아서면, 안도감 같은 게 오히려 먼저 온다. 그것은 “오늘은 마주치지 않았다” 같은 안도감이다.

 

 

 

이번엔 서랍을 열어 본다. 아주아주 예전에 받은 선물로 받은 몽블랑 볼펜과 만년필들을 비롯, 다른 고급진 문구류들이 있다. 좋은 종이, 좋은 노트, 잘 깎인 연필, 가끔은 뜯지도 않은 스티커나 포스트잇. 손끝으로 만져보면 여전히 느낌이 좋다. 질감이 좋고, 무게감이 좋고, 쓰는 순간의 저항이 좋다. 나를 나답게 만들었던 종류의 “좋음”이다. 그런데 그 좋음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끔 무겁다. 물건이 무거운 게 아니라, 물건이 지키고 있는 약속이 무겁다. 이 만년필은 단순히 펜이 아니라, 내가 되기로 했던 어떤 사람의 상징같은 그 무언가로 남아 있다.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 어설프더라도 계속 쓰는 사람. 말과 생각을 밖으로 꺼내놓는 사람. 서랍 속의 몽블랑은 그 사람의 증거로 눕혀져 있는데, 요즘 난 그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

 

 

 

나는 원래 수집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이캐스트, 만년필, 키보드, 고급 문구류. 지금도 그것들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수집의 재미는 쓸모에서 오지 않는다. 현실적인 쓸모 보다는.. 물건 자체의 완성도에 감탄하다 보니, 내가 거기서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마감이 깔끔한지, 구조가 정직한지, 눌림이 자연스러운지, 잉크가 흐르는 방식이 마음에 드는지. 제작 당시 누군가의 집착이 들어갔을법한 물건들을 손에 쥐면, 이상하게 안정이 왔다. “세상 어딘가에는 이렇게 제대로 만든 것들이 있구나.” 나는 그 감각을 좋아했다. 수집은 내 취향을 모으는 일이었고, 취향은 때로 내 정체성을 대신했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 그 한 문장이 내 하루를 조금 덜 흔들리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수집은 취미가 아니라 보관이 됬다. ‘지금’의 나를 위해 모으는 게 아니라 ‘언젠가’의 나를 위해 맡겨두는 것처럼. 창고의 다이캐스트는 언젠가 꺼내 다시 진열할 나를 기다리고, 서랍의 몽블랑은 언젠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나를 기다린다. 그 언젠가는 늘 그럴싸하다. 그 언젠가가 오지 않으면 물건은 미사용품이 되고, 미사용품은 조용히 자막을 깐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작은 글씨로, 귀찮을 만큼 또렷하게 말이다.

 

왜 샀지.
언제 쓰지.
아직도 그대로네.
결국 나는…

 

이 자막의 무서운 점은 죄책감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잠깐 찔리고 끝이면 차라리 괜찮은데, 자막은 점점 내 인생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마치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라는 증거처럼. 나는 물건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물건이 나를 평가하는 것 같아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안 쓰는 물건은 허무를 키운다. 물건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물건이 내가 미뤄둔 삶을 계속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즘 내 삶에 자리잡은 두 개의 취미가 있다. 레시피를 따라 해먹는 것과 밖을 걷는 것. 딱히 내세울만한 대단한 취미는 아니다. 거창한 의미도 없다. 그냥 맛있는 걸 먹고 싶고, 걸으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니까. 특히 나는 혼자 걷는 게 익숙하다. 말할 것을 생성해내려면 에너지가 든다. 걷는 동안에는 아무도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사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그런 질문을 잠시 유예해 둘 수 있다. 건강한 관절과 인대와 건만 있으면 되니깐 말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들 저런들 다 뭔 소용인가? 하는 그 마음이 든다. 대체로 이런 생각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부터 온다. 자동화, 쓸모없어짐, 경제적 고난, 자산불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의 문장들. 논리적으로 너무 그럴듯해서, 반박하려 하면 오히려 더 깊고 서글퍼진다. 그리고 그 사슬이 달릴 때, 집 안의 미사용품들이 은근히 가속도를 붙인다. “그러니까 니가 아직도 시작을 못 했잖아.” 같은 느낌으로. 그래서 나는 요즘 ‘새로운 걸 갖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신기하게도 진짜 그렇다. 

 

틀림없이 예전엔 새로운 게 있으면 설렜었는데, 지금은 새로움이 곧 관리해야 할 것이 된다. 충전해야 하고, 업데이트해야 하고, 자리 마련해야 하고, 언젠가 써야 한다. 새 물건은 새 자유가 아니라 새 체크리스트로 들어온다. 나는 이미 미래 때문에 버거운데, 집 안에서도 미래를 예약하고 싶지 않다. 추가할 칸이 없는 게 아니라, 추가할 칸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더 많은 것이 아니라 더 가벼운 공기다.

 

다 버리겠다는 선언을 하고 싶지는 않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건 또 다른 성취 과제가 되고, 성취 과제는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내 목표는 더 현실적이고 작다. 내 눈이 덜 피곤한 집. 내 마음이 덜 찔리는 집. 내일의 내가 덜 미안한 집. 허무가 더 이상 증식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빈칸. 딱 그 정도면 된다.

 

그래서 나는 ‘버림’보다 ‘의식’을 생각한다. 시즌 전시처럼, 딱 한두 대만 꺼내서 눈에 보이는 곳에 놓는 것. 그걸로 “이건 내 과거가 아니라 내 현재에도 닿아 있다”는 감각이 돌아온다. 서랍속 몽블랑도 마찬가지다. 이걸로 인생을 바꿀 거창한 글을 쓸 필요는 없다. 하루에 세 줄이면 된다. 오늘 가장 걱정 1개, 내가 통제 가능한 1개, 오늘 내가 한 증거 1개. 몽블랑이 비싼 이유는 특별히 글씨가 잘 써지기 보다, 그저 많은 사람의 시간이 이 물건을 제작하는데 녹아들어갔기 때문이다. 카트리지를 꼽고 오늘은 잘 써지게만 하자. 미사용이라는 꼬리표만 떨어져도 집 안의 자막들은 조금 조용해진다.

 

나는 오늘도 레시피를 따라 해먹고, 밖을 걷는다. 창고 문은 자주 열지 않는다. 정말 가끔 서랍은 열어서 몽블랑을 손에 쥐었다가 다시 넣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안다. 내가 원했던 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무거움을 줄이는 방식이었다는 거다. 안 쓰는 물건이 허무를 키울 수 있다면, 쓰는 한 줄과 꺼내 놓은 한 대가 허무의 번식을 막을 수도 있다. 큰 계획 대신 작은 빈칸 하나. 아무튼, 오늘도.

 

창고의 다이캐스트는 모두를 꺼내 달리게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한 번쯤은 보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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