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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실험실/물건 노트

키보드 지름의 정류장에서

by 공튼이 2025. 6. 6.

지름(!)의 정류장에 앉아 있다.

지름이라는 건 참 이상한 버릇이다. 지금 쓰는 것에 큰 불만은 없는데도, 자꾸 다음이 궁금해진다. 마치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은 막연한 기분. 그 끝에, 결국 다시 앉는 건 '키보드'라는 정류장이다.

 

구입한지 5년된 Leopold FC660C 저소음버전 키압 45g, 유선 전용만 출시됬다. 같은 제조사의, 동일 배열을 한 기계식 버전은 블루투스 모델이 나오는데, 유독 이녀석만 출시가 안된다. 요즘 리얼포스 키보드에 들어가는 키 인식 깊이 조정기능(APC)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별 탈 없고, 글자도 잘 써졌다. 개인적으로 단일 모델로 가장 길게 사용한 키보드이자, 지금의 날 만들어준 물건 같다. 그런데 문득 기변욕구가 올라온다. R3 TKL은 어떨까... 이게 뭐라고, 손끝 느낌 하나에 이렇게 고민을 오래 한다.

 

개인적으로 단일 모델로 가장 오래 사용한 FC660C 3세대 저소음 모델

 

정전용량식 키보드를 처음 타건해 본 게, HHKB 먹각으로 거의 20년 전이었다. 당시에도 26만 원이나 하는 초고가 키보드였고 학생신분이었던 나에겐 너무 큰돈이어서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취업 후 몇년 지난 2012년, 체리 청축으로 첫 기계식 키보드에 입문했고 그후. 5년 뒤 쨍한 클릭음과 텅빈 하우징의 통울림 소리에 익숙했던 나에게, 검정색 PBT 키캡을 장착한 1세대 FC660C의 촉촉하면서도 명확한 타건감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물론 요즘 분위기는 완제품보다는 커스텀 쪽으로 많이 넘어가고 있다. 정전용량 무접점 키보드의 전성기, 예전만큼의 열광은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방식이 주는 감각을 믿는다. - 조용하지만 구분감 있는 그 느낌 - 가끔 들르는 키보드 사이트에 떠오른 'Realforce R3 TKL 45g' 사용기. 출시된 지 2년 가량 되어 롱텀 후기들이 있었다. 슴슴한 화이트나 블랙 외에도, 민트색 키캡과 블루 포인트의 화려한 조합이 눈에 확 들어왔다. 호기심으로 클릭했는데, 그 호불호 갈린다는 색상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타건 영상의 소리는 FC660C보다 통울림이 덜하고 단단하게 들렸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 여행지 맛집 줄서기였다. 30분 기다려 먹은 식사는 나쁘지 않았지만 특별히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Realforce 라는 브랜드가 좀 그런 느낌이 있다. 유독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비싼 가격과 희소성에 혹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아이를 쓰면, 굳이 왜 이걸 골랐는지 지인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장점이 있다. 심지어 요즘은 한국으로 수입되는 물량 자체가 줄어든 것 같다. 사실 그간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레오폴드 66키 배열을 포기하면서까지 갈아타기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25년도 현재까지 FC660C 중, 블루투스 지원이 되는 모델이 한번도 출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R3 TKL 균등 45g 모델을 들이기로 했다. 

오후 네 시, 택배가 도착했다. Realforce R3 TKL 45g. 어제까지만 해도 '집화 완료'로 멈춰 있던 배송이 갑자기 빨라졌다. 박스를 뜯는 순간, 그 색상이 예상보다 더 강렬했다. 민트색과 블루의 조합이 생각보다 훨씬 선명하고 과감했다. 좋다고 해야 할지,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지 애매한 첫인상이었다. 첫 타건. 확실히 FC660C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더 단단하고, 더 직접적이었다. 하지만 39만 원을 들여서 느끼는 차이치고는... 미묘했다. 

 

실물이 어딘가 쨍한 색감이다.

 

솔직한 감상? 생각보다 만족스럽다. 아니, 정확히는 '만족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클까. 39만 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좋아해야 한다는 자기 최면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방어기제를 제쳐두고라도, 민트색 키캡들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모습만으로도 뭔가 특별한 기분이 든다.

 

실은 이런 구매 패턴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5년간 키보드만 무려 10대를 갈아탔다. 기계식 청축으로 시작해서 갈축, 그다음 정전용량식. 각각을 살 때마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다짐했는데, 결국 또 여기 있다.

 

Groove 87 FR4 초기형에 마제 한정판 이색사출 SA 키캡

 

660M, 660C 가족들. 반사적으로 우측 쉬프트키 아래로 엄지손가락이 미리 나가있다.

 

지름의 의미

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이미 충분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 더 나은 것을 찾아 헤맬까? 어쩌면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비교하고, 선택하는 행위.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감각을 추구하는지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그리고 이번에는 익숙한 키 배열보단, 연결을 위한 편의사양이 내게 생각보다 중요했다는 걸 알게 됐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쉽게도 이 키보드가 오랫동안 써왔던 FC660C랑 비교했을 때 가격 차이만큼 좋다는 느낌은 딱히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갈아탈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키감과 더불어, 사실 익숙한 66배열 보단 블루투스가 필요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오후 7시, 새 키보드로 지금 첫 글을 작성 중이다. 민트색 키캡들이 자꾸만 내 시선을 훔친다. 66키 배열이 손에 익어, 아직도 반사적으로 우측 쉬프트키 아래로 엄지손가락이 미리 나가있다. 지금 이 순간의 기대감도, 앞으로 느낄 소소한 만족이나 실망도, 모두 내가 선택한 경험의 일부다. 물론 다음에 또 다른 키보드에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은 이 민트색 키보드를 충분히 즐겨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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