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어느 한 중식요리 전문점에 가면, 칠판에 쓰여진 메뉴판에 ‘욕망의 새우볶음밥’이 있다. 그냥 새우볶음밥도 있는데, 굳이 ‘욕망의’라는 수식이 붙은 메뉴가 저렇게 있다. 가격도 살짝 더 나간다. 그리고 그 차이는 아주 정직하다. 그릇 위에 올라간 새우가 “조금 더”가 아니라 “아주 확실히 더” 많다. 먹기도 전에 눈으로 납득되는 양. 주문한 사람은 대개 첫 숟갈 전에 이미 만족을 시작한다. 그래. 이게 우리가 말하는 욕망이지.! 설명이 필요 없는 확신이다.

사실 이런 흐름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겉모습이 그럴듯해서 구입한 샌드위치를 열어봤는데 잘려진 단면에만 속재료가 있고 빵 가장자리 부분이 텅텅 비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당혹스러운 기분과 함께, 어딘가 좀 사기당한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점잔케 말해서 지불한 비용과 기대한 만족감 사이에 생긴 크나큰 갭을 느낀 것이다. 포만감으로 날려버린 기회비용은 덤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불쾌한 경험 이후로, 우리는 음식에서 ‘비어 있지 않음’을 먼저 확인하고 싶어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요즘의 ‘뚱’들이 생겨난 방식은 꽤 자연스럽다. 뚱샌드, 뚱카롱, 그리고 어딘가 무거워보이는 한국식 잠봉뵈르 샌드위치 가 그 예이다. 버터가 “바른다”는 말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을 만큼 두툼하게 자리 잡은 샌드위치를 보면, 지나치다는 생각이 먼저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것 같다. 얇게 바른 버터가 내는 향과 균형보다는, 눈으로 확인 가능한 판 버터가 주는 확신이 더 빨리 우리를 설득하는 시대가 된 셈이다.
프랑스 현지식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 인들이 방송에서 이야기 한 잠봉뵈르에 대한 고증은 내가 경험한 것 보담은 단촐해 보였다. 바게트와 햄, 그리고 얇게 바르는 버터. 재료가 적어 허전한 것이 아니라, 더 또렷해지는 맛이 있다고들 한다. 바게트의 바삭함, 햄의 짭짤함, 버터의 향. 셋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발씩 물러서며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느낌. ‘조화’라는 단어가 가진 고집스러운 아름다움이다.
반면 이곳에선 그 조용함은 자주 큰 소리로 바뀐다. 버터가 두꺼워지고, 크림은 넘치고, 치즈는 더 늘어난다. 마카롱은 섬세한 간격을 잃고 “마카롱의 탈을 쓴 디저트”가 되어버린다. 크로와상은 결의 파삭함 대신 소스와 크림을 담는 습기찬 글러브가 되고, 피자도 어딘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 국적의 피자와 한국에서 판매하는 피자. 분명 같은 이름을 쓰는데, 목표가 다르다. 어딘가는 ‘재료를 살리는 방식’에 가깝고, 어딘가는 ‘욕망을 채우는 방식’에 가깝다.
냉동만두들도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요즘엔 만두 피가 얇으면서, 소를 푸짐하게 넣은 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은 제품들이 많다. 물론 얇은 피가 주는 섬세함과, 푸짐한 소가 주는 만족을 동시에 잡겠다는 욕망은 사랑스럽다. 다만 균형이 무너지면 만두는 ‘조합’이 아니라 ‘속의 덩어리’가 되고, 끝까지 먹는 경험이 금방 피곤해진다. 내가 ‘뚱’ 트렌드를 보며 자꾸 조화로움과 거리가 있다고 느끼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쯤이다. 한 재료의 비중이 커질수록, 맛의 대화는 줄어든다.
이런 과잉이 단순히 미식의 퇴행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욕망의 새우볶음밥’처럼, 이 시대의 과잉은 꽤 성실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지불한 비용 대비,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면 어딘가 억울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우리는 배부르고, 실패 없이 만족하고 싶어한다. (그리곤 사진을 찍는다.) 단면은 요즘의 언어다. 긴 설명 없이도 한 장의 단면이 말해준다. “봐, 이 정도면 괜찮지?” 비싸다면 비싼 만큼 눈에 보여야 하고, 좋은 재료라면 좋은 재료답게 존재감이 있어야 한다. 얇은 향보다 두꺼운 확신이 더 즉각적이다.
하지만 ‘확신형 음식’은 종종 끝이 무겁다. 첫 숟갈은 즐겁지만, 몇 숟갈 뒤엔 속도가 늦어진다. 한 입의 임팩트는 크지만, 마지막 한 입까지 같은 기분을 유지하긴 어렵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묻게 된다. 오늘 내가 원하는 건 ‘충격’인가, 아니면 ‘완성감’인가. 욕망은 빠르게 만족되지만, 조화는 오래 남는다.
흥미로운 건, 이런 과잉이 오래 이어지면 어느 순간 ‘절제’가 새로움이 된다는 점이다. 많이 넣는 것 자체가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결국 “얼마나 넣었는가”보다 “어떻게 넣었는가”를 보기 시작한다. ‘가득’에서 ‘잘 채움’으로. 단면의 과시에서, 끝까지 먹었을 때의 균형으로. 덜 넣는 게 미덕이라기보다, 더 잘 넣는 게 미덕이 된다. 아까 그 중식집의 ‘욕망의 새우볶음밥’은 그래서 왠지 상징처럼 느껴진다. 새우가 아주아주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그 메뉴의 정체성이자 설득이고, 그 설득은 너무나 명쾌해서 오히려 우습게 다정하다. 우리에게는 한동안 그런 명쾌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어 있던 샌드위치의 기억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면, 언젠가 ‘과잉의 피로’가 우리를 다시 조화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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