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식과 기억/집밥

반찬통의 경계에서 시작된 야식

by 공튼이 2025. 8. 16.

이따금씩 부모님이 들르셔서 두고 가신 식재료는 숙제로 남을 때가 많다. 다행히도 이번엔 손질된 멸치다. 어떻게 먹을까 하다가 마트에서 꽈리고추를 사 와 반찬을 만들기로 했다. 오늘은 반찬만 만들 생각이었다. 내일 아침을 위한 꽈리고추 멸치볶음.

 

먼저 마른 팬에 멸치만 한 번 볶아 비린내를 날렸다. 달그락 소리가 바삭함으로 바뀌자 접시에 잠시 옮겨 놓았다. 같은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살짝 볶아 향을 냈다. 간장·맛술·올리고당을 섞은 양념장을 부어 한소끔 끓인 뒤, 반 갈라 숨통을 틔운 꽈리고추를 먼저 넣었다. 고추가 살짝 숨이 죽을 때까지 뒤적이다가, 아까 덖어 둔 멸치를 넣어 함께 볶았다. 덜 날아간 비린 향이 존재감을 드러내면 맛술로 응징해 주면 된다. 양념이 골고루 입혀지고, 수분이 충분히 졸아들면 불을 끄고 참기름으로 마무리 해준다. 고추의 맵삭함과 멸치의 바삭함이 맞물렸다.

 

문제는 반찬통이었다. -_-.. 뚜껑이 닿기도 전에 수북했다. 난 내일을 위해 만들었다지만, 오늘을 소홀히 할 뻔했다. 결국 타협했다. 밤 10시에 흰쌀밥을 먹기엔 양심이 허락치 않았다. 천천히 늙고 싶다. 선반에 있던 저속노화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계획은 반찬이었지만 결과는 한 끼였다. 갓 데운 밥 위에 멸치를 올리고, 반쯤 익은 꽈리고추를 얹었다. 숟가락이 들어갈 때마다 팬에서 막 내려온 뜨거움이 밥알 사이를 채웠다.

 

 

멀리서 온 이 멸치에는 말려 온 시간과 손길이 들어 있다. 나는 그 마음을 기름과 불로 데우고 우리 집의 온도로 맞췄다. 맛술은 비린내를 줄였고, 간장은 간을, 올리고당과 참기름은 마무리의 부드러움을 맡았다. 밥그릇이 비어 갔지만, 반찬통 속 멸치는 여전히 넉넉했다. 최소한의 재료로 충분한 위로를 만드는 일, 그게 집밥의 기술이라면 오늘은 그 교과서였다.

 

팬이 식고, 반찬통은 닫혔다. 비워진 그릇 하나. 그 사이에 오늘의 만족이 있었다. 반찬을 만들다 한 끼를 마친 밤, 나는 생각한다. 계획보다 맛있는 선택을 하면 내일 먹을 반찬은 또 생긴다.

 

# 레시피

  1. 마른 팬에 멸치만 넣고 달달 볶아 비린내를 먼저 날린다. 접시에 빼 두기.
  2. 식용유 두르고 다진 마늘을 살짝 볶아 향을 낸다.
  3. 간장·맛술·올리고당을 섞어 팬에 붓고 한소끔 끓인다.
  4. 반 갈라 둔 꽈리고추를 넣고 아삭함이 남을 정도로 볶는다.
  5. 덖어 둔 멸치를 넣어 빠르게 버무리듯 볶는다. 비린 향은 맛술로 해결한다. 수분이 졸아들면 불을 끈다.
  6. 짠맛이 부족하면 간장울, 윤기 부족하면 올리고당 약간, 뜨거울 때 밥과 만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