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가득한 방에 들어선다. 두어 장만 마주놓았을 때는 내 얼굴이 몇 번 겹치다 곧 멈췄지만, 벽면 전부를 은빛으로 채우면 풍경이 달라진다. 왼쪽 거울이 오른쪽 거울을, 오른쪽 거울이 다시 왼쪽 거울을 비추며 복사가 반사를 낳고, 반사가 다시 복사를 낳는다. 움직임은 끝이 없어 보이지만 장면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그대로 출력하는 짧은 프로그램 — Quine — 도 그렇다. 실행할 때마다 코드가 자기 자신을 토해내지만, 내용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복사만으로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입력은 단지 Enter 한 번, 결과는 ‘나 자신’의 완벽한 복사본.
어딘가 초라하고 기이한 그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을 간질였다—마치 무한 거울방에서 내 얼굴이 끝없이 반사되는 순간처럼.
Quine, “스스로를 말하는 프로그램” 이다.
n='n=%r\nprint(n%%n)'
print(n%n)
문자열 n 안에 자기 자신을 서식 자리로 잠깐 숨긴다.
print가 그 문자열을 받아 다시 채워 넣으면, 입력과 결과가 완벽히 포개진다.
글자 n%n 이 만든 무한루프 같은 정적(靜寂)— 기묘한 느낌이다.

휴대전화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면 또 다른 거울방이 펼쳐진다. 알람을 끄자마자 올리는 커피 사진, 점심엔 비슷한 학식, 저녁이면 퇴근. 쌓이는 사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래로 스크롤할수록 날짜만 바뀐 게시물이 켜켜이 쌓인다. 익숙한 패턴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만, 어느 순간 고개가 갸웃해진다. 오늘이라는 페이지가 어제와 정말 다른가? ‘일상 Quine’이라 불러도 좋을 이 복사본 더미는, 편안함 대신 정체를 남긴다. 날짜만 바꿔도 결국 비슷한 고민을 되새김질… 우리의 글도 작고 은근한 Quine 인것을..!
그러다 문득, 세포 하나를 생각한다. 분열할 때마다 DNA는 자신을 복제한다. 대체로 완벽하지만, 아주 가끔 작은 오류가 스며든다. 돌연변이라 불리는 그 흔들림이 쌓여 생명은 형태를 달리하고, 더 나은 환경을 찾아간다. 코드도 마찬가지다. Quine 에 한 글자만 비껴 쓰여도 예상치 못한 출력이 나타난다. 복사 속에 섞인 아주 작은 불완전함이 새로운 길을 연다.
결국 답은 분명했다. 복사만으로는 풍경이 바뀌지 않았고, 변형만으로는 처음의 나를 알아볼 수 없었다. 거울 사이, 복사와 돌연변이가 맞닿은 틈. 오늘 밤 우리는 ‘나’라는 프로그램을 다시 빌드한다. 내일 아침, 한 글자 달라진 바이너리가 문제없이 동작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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