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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로그/지나간 오늘들

2019 - 2020 빨간 점들의 도시

by 공튼이 2025. 8. 7.

1. 사회과부도 책 속 붉은 구역들

먼 옛날 국민학교 시절 때 펼쳤던 사회과부도에는 서울·수도권이 짙은 적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20여 년 넘게 시간이 흐른 2019년, 그 빨간 점 가운데 어느 한곳에서 숨 쉬고 있던 나는 숫자를 통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수도권(서울‧인천‧경기)에는 약 2,600만 명이 1만 2,685㎢에 모여 살았다. 사람이 적은 경기 외곽을 포함했는데도 평균 2,000명대 중반의 밀도다.

2. 2019년, 황금빛 밀집의 시대

시간이 사라지는 도시

마켓컬리 새벽배송이나, 쿠팡 로켓배송이 일상이 된 것도 밀집 덕이었다. 2019년 기준 쿠팡의 일평균 배송 건수는 약 220만 건, 코로나19가 본격화된 2020년 4월에는 300만 건 안팎까지 치솟았다. 자정 전에 주문한 식료품이 새벽 7시 전에 도착했고, 강남역에서 판교까지는 30분이면 충분했다. 서울 내부 평균 출근 시간은 44.7분, 경기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경우엔 72.1분이었다. 뉴욕시 평균(40.6분), 런던(약 46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서울 지하철 9호선 급행열차가 김포공항에서 종합운동장까지 끊김없이 달리면 ‘60분대→30분대’로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 평균 역간 거리는 1.7 ㎞ 남짓이라 ‘걸어서 10분 안에 지하철역’이 서울의 생활 상식이 됐다.

우연한 충돌, 계획된 혁신

수요가 밀집된 판교 테크노밸리·강남·을지로에선 ‘옆 테이블 대화’가 그대로 사업 제안서가 됐다. 2019년 수도권 벤처‧스타트업 투자액은 4조 2,777억 원으로 처음 4조 원을 돌파하며 전국 투자금의 70%를 빨아들였다.

공유와 연결의 인프라

위워크는 2019년 한 해에만 홍대·선릉 등 최소 3개 지점을 새로 열어 서울 시내 운영 지점이 18곳을 넘어섰다. 편의점·카페·상수도 같은 생활 인프라가 ‘5분 생활권’으로 깔리고, 셰어하우스·공유부엌이 관계망을 촘촘히 엮었다. 밀집은 고립이 아니라 연결이었다.

 

 

3. 2020년, 빨간 점이 경보음이 되다

1월 20일, 첫 균열

대한민국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2020년 1월 20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설 연휴 수백만 명이 이동하며 바이러스가 수도권·영남으로 퍼질 길이 열렸다.

2월, 집단감염

2월 말 대구 신천지 교회 집단감염이 터지자 누적 확진자의 60% 이상이 신천지 관련 사례로 분류됐다. 이어 구로 콜센터 같은 고밀도 실내 공간에서 초단위로 전파가 일어났다.

텅 빈 지하철, 닫힌 카페

2020년 3월, 국내 도시철도 통행량은 전년 동월 대비 최대 43% 급감했다. 강남대로의 불야성은 사라졌고, 위워크(공유오피스)·카페·식당은 연쇄 휴업에 들어갔다. 밀집이 만들어낸 즉시성은 바이러스에게도 즉시성을 선물했다. 30분 배송이 가능하던 물류 네트워크를 따라 바이러스도 30분 만에 서울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동시에 휴대폰 기지국ㆍ카드 결제 데이터를 활용한 초정밀 역학조사가 이뤄지며, 물류·교통 인프라는 감시 인프라로 재편됐다.

집콕 경제의 급부상

  • 재택근무 : 고용노동부가 2020년 7월 5인 이상 사업장 400곳을 조사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48.8 %가 재택근무 제도를 도입했다고 답했다.
  • 재택교육 : 전국 초·중·고는 4월 9일부터 순차적으로 ‘온라인 개학’을 실시하며 정규 수업을 원격으로 진행했다.
  • 밀키트 시장 :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국내 밀키트 시장 규모는 2017년 20억 원에서 2020년 1,880억 원으로 무려 100배가량 성장했다. 칼과 도마를 꺼낸다는게 요리의 큰 허들이었거늘, 많은이들이 요리를 배우게 되었다.
  • 요리 유튜버 전성시대 : 유튜브가 발표한 ‘2020 국내 구독자 수 증가 TOP 10 에서 무려 요리유튜버가 3건이나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 나스미디어 조사에선 이용자의 39.4 %가 ‘요리·음식·맛집’ 콘텐츠를 가장 즐겨 본다고 답했다.

“사무실과 교실이 사라진 자리에 부엌과 모니터가 들어섰다. 밀집은 거리두기 속에서도 새로운 형태로 자신을 복제해 냈다.”

4. 밀집의 역설, 그리고 질문

같은 지도, 다른 의미

어린 시절 사회과부도의 빨간 점은 2019년엔 기회의 지도가 되었고, 2020년엔 위험의 지도가 됐다. 물리적 거리는 2 m로 벌어졌지만, 줌(Zoom) 화면 속 디지털 거리는 0 m로 줄어들었다.

회복력 있는 밀집을 향해

2024년, 스타벅스 강남점 좌석은 다시 만석이고 테크 회의실은 재빨리 예약이 찬다. 하지만 다음 위기가 오면 ‘즉각 분산→위기 해소 후 재집결’이 가능한 회복력 있는 밀집(Resilient Density) 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됬다.

에필로그 ― 여전히 빨간 점을 선택하는 이유

나는 아직도 그 빨간 점 안에 산다. 만원 지하철과 좁은 카페에서 얻는 우연한 만남, 즉각적인 기회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팬데믹은 밀집의 취약성과 소중함을 동시에 가르쳐 주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문명이 있고, 문명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다. 다음 번에는 더 지혜롭게 모이고 흩어질 방법을 찾을 것이다. 빨간 점의 도시가 배운 생존법이다.